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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종'이란 낱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함"이다. 크든 작든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가 방종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앞에 '자유'라는 단어를 꼭 집어넣어야겠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자신들만이 지킬 수 있다고 우기던 우두머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보이는 '방종'을 지켜봐야 하는 우울함 넘치는 요즘이다. 잊었던 단어 '방종'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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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0월 11일 자 <매일경제> 기사 "조금 넘쳐도 사치스럽고 싶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우리 역 직장인을위한영어회화 사에서 언론이 '작은 방종'을 부추기던 시절이 있었다. 외환위기 1년 전인 1996년 10월 한 언론은 '조금 넘쳐도 사치스럽고 싶다'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통해,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작은 방종'이 21세기를 몇 년 앞둔 당시 유행하는 '신사고'라는 주장을 폈다.

당시 물가에 비해 약간 높았던 인터넷 접속비용 기업은행 대출상담사 을 부담할 능력만 있으면, 사이버공간을 통해 마돈나, 신디 크로퍼드 등 세계적인 미녀들과 섹스를 즐기는 것이 '작은 방종'의 한 사례로 제시되었다.
인류 역사 속 '작은 방종'의 사례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인들이 누렸던 허시 초콜릿바와 나일론 스타킹이 언급되었다. 하루에 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전쟁으로 죽어가는데, 지구 한편에서 초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 콜릿바를 통해 달콤함을 즐기고 나일론 스타킹을 입고 긴 다리를 뽐내는 것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방종'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언론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흉내 내는 '작은 방종'에 새로운 커피문화도 빠질 수 없었다. 점심 식사 후 들른 커피전문점에서 습관처럼 '그냥 커피'를 주문하면 분위기 없고 무식하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stx 여러 페이지나 되는 커피 메뉴에서 가장 그럴듯한 메뉴를 선택하고, 제대로 된 외국어 발음으로 주문하는 것이 무시당하지 않는 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 커피전문점 메뉴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즘 웬만한 카페 메뉴보다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음료들이 가득하였다. 커피전문점 고객 중 적지 않은 부류가 '작은 방종'을 즐기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 신문에 커피 관련 기사가 가장 많이 실렸던 것이 '작은 방종'이 부추겨지던 1996년이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겨레> <매일경제> 등 다섯 신문에 실린 커피를 다룬 기사가 무려 1345건이었다. 전무후무한 관심이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다양한 커피를 소개하는 기사, 커피로 '작은 방종'을 뽐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사였다. '그냥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고자 하는, '작은 방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즐길 만한 내용들이었다. 당시 주요 언론에 소개된 '작은 방종'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커피를 몇 가지 소개해 보자.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자유
<경향신문> 1996년 10월 16일 자에는 여섯 가지 커피의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다. 집에 온 손님에게 내놓으면 분위기를 좋게 할 커피들이라고 했다. '초콜릿커피'는 따끈하게 내린 원두커피에 기다란 막대 모양의 초콜릿을 세워서 만든다. 초콜릿이 녹으면서 점점 달콤해지는 것이다.
'계피향커피,' 일명 '시나몬커피'를 만들려면 계피가루와 원두가루를 섞은 후 함께 내리면 된다. 이때 분위기를 살리려면 커피잔에도 계피가루를 발라야 한다. '카페 브라질레뇨'도 있다. 우유 반 잔을 뜨겁게 데워 강하게 끓인 커피 반 잔과 섞는다. 그리고 초콜릿바를 잔에 걸쳐놓는 식으로 만든다.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 플라멩코'는 약하게 탄 커피에 체리술을 약간 넣고 위에 생크림을 얹어서 만든다. 그 위에 체리 하나를 얹으면 보기에도 아름답다. '카페 슬라브'도 있다. 커피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고 그 위에 초콜릿파우더를 뿌린다.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섞이면서 독특한 맛을 낸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커피는 '커피 하와이아노'다. 뜨거운 커피에 파인애플 주스를 조금 넣고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는다. 잔 둘레에 바나나를 장식해 마실 때 함께 먹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다.

소개된 커피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보통 사람들이 마시는 인스턴트커피가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원두커피를 사용한다는 것, 둘째는 구하려면 조금 투자가 필요한 수입 식재료를 가미한다는 점이다. 커피 세계에서도 '작은 방종'은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자유였다.










▲  1996년 11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커피 한잔에 가을 한스푼"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는 1996년 11월 13일 자 전면 기사 '커피 한잔에 가을 한 스푼'에서 손님이 왔을 때 커피를 직접 만들어 '이국의 향'을 즐기라고 권했다. 손님 접대를 집에서 하는 문화가 남아 있던 시절, 손님이 찾아왔을 때 품위 있게 대접하는 법의 하나가 특별한 커피를 내놓는 것이었다.

이 기사에서는 강하게 볶은 원두와 계피가루를 섞어 내린 에스프레소에 우유 거품과 휘핑크림은 얹어 만드는 카푸치노, 유리잔에 위스키를 부어 불을 붙인 뒤, 불을 끄고 초콜릿 시럽과 설탕, 에스프레소, 휘핑크림을 넣어 만드는 아이리시커피를 소개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존재 자체를 모르던 식음료 재료들 이름이 많다.
이 외에도 비엔나커피, 카페오레, 그리고 카페로열 레시피가 실렸다. 1990년대 중반에 유행했던 '카페로열'은 나폴레옹이 즐겼다는 풍문과 함께 고급 호텔이나 커피전문점에서 '작은 방종'을 뽐내기에 적합한 커피였다. 커피를 담은 잔 위에 별도로 제조한 스푼을 걸치고, 각설탕을 스푼 위에 올린 후 브랜디를 부은 다음에 불을 붙여서 설탕을 녹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브랜디와 함께 녹은 설탕을 커피에 붓는 것이다. 보는 재미가 있는 커피였다.
<조선일보>는 1996년 10월 10일 자에서 당시 유행하던 '향커피'를 크게 소개했다. 헤이즐넛, 에메랄드아이리시, 프렌치바닐라 등은 커피에 무엇인가를 가미한 '향커피'였고,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하와이 코나, 케냐 AA, 스칸디나비얀브랜드는 그 자체의 향이 진해서 향커피에 못지않은 고급 커피로 소개되었다.
<조선일보>는 1996년 8월 31일 자에서 몇 곳의 신상 카페를 소개했다. '작은 방종'의 중심지 서울 강남 신사동과 청담동에서 커피 한잔에 5천 원 내지는 1만 원을 받는 업소들이었다. 일반 카페의 두세 배 가격이었다. 해외에서 직접 들여온 생두를 그날그날 볶고, 갈아서 내놓는 커피바 '하루에'와 '팔라디오'였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아무 때나 아무 커피나 먹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방종을 자유라고 부르짖는
커피 메뉴 소개와 함께 나라별 커피의 특징이나 커피문화 소개로 해외여행을 부추기는 기사도 넘쳐났다. 서울올림픽 이듬해에 시작된 '해외여행' 자유화, 그리고 1년 전에 달성한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부른 해외여행 붐에 편승한 기사들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커피의 부상(<동아일보>, 1월 15일), 케냐 커피 맛의 비결(<조선일보> 1월 30일), 커피로 점치는 터키인들(<조선일보>, 2월 29일), 지구촌 카페 여행(<매일경제>, 3월 13일), 커피 생산국 에티오피아(<매일경제>, 3월 22일), 커피하우스의 나라 오스트리아(<조선일보>, 4월 18일), 커피 한잔에 토론 한 마당 프랑스(<한겨레>, 7월 4일) 등이었다. 2월 어느 날 EBS는 터키 커피를 소개했고, 5월에 KBS는 예멘 커피를 다뤘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넘치는 사회가 되었다. '작은 방종'이 아니라 '큰 방종'을 자유나 권리라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일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도처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고 기가 차다.
1996년 12월 16일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항소심에서 내란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방종을 일삼은 전두환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게 시종 전두환의 뒤를 따라 영화를 누렸던"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에서 17년으로 감형이 선고되었다. 이들의 감형에는 6.29선언으로 7년여 만에 내란을 종식시킨 공이 참작되었다.
방종을 일삼던 내란범들에게 천수의 길을 열어주고, '작은 방종'을 뽐내던 대한민국은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97년 12월 대선에 출마한 여야 후보 3명은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된 김대중은 공약을 지켰다.
방종을 자유라고 부르짖는 무식한 인간들이 넘치는 요즘, 과연 내란범들의 운명은, 일 년 후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만 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커피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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